고려는 '군사공동체 국가'… 중앙군 체제가 거란·여진 물리친 원동력

입력 2018-08-10 18:16  

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13) 고려왕조의 지배체제




공전과 사전

936년, 고려는 후백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신라의 귀순을 받아들여 청천강 이남의 영역에 한하지만 한반도를 다시 통일했다. 고려는 이전의 신라와 마찬가지로 전국의 토지를 국전(國田), 곧 국왕의 소유로 간주하는 이념에 기초해 토지와 백성에 대한 지배체제를 구축했다. 전국의 토지는 공전(公田)과 사전(私田)으로 구분됐다. 공전은 왕실과 정부가, 사전은 귀족·관료·중앙군의 지배세력이 조(租)를 수취하는 토지를 말했다. 신라와 마찬가지로 공과 사의 대립과 통합이 국왕과 지배세력의 수준에서 성립한 것이 고려의 국가체제였다.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은 사의 주체로 인정되지 않았다.

973년과 992년의 두 법령에서 확인되는 공전과 사전의 조세율은 각각 4분의 1과 2분의 1이었다. 그로 인해 10세기 말까지 고려의 국전제(國田制)는 명분에 불과했다. 사전은 귀족·관료의 사령(私領)과 같았다. 개선사석등기에서 보듯이 9세기 말 사전의 조세율은 4분의 1이었다. 그것이 후삼국기의 혼란 통에 두 배로 올랐다. 태조 왕건은 호족의 도움으로 후삼국을 통일했다. 초창기의 고려는 호족과의 연합체였다. 호족은 점차 중앙정부의 귀족·관료로 편입되지만, 여전히 그들의 사령에서 수확의 절반을 수취했다. 고려는 그것을 통제할 능력이 없었다.


집권체제의 정비

고려가 호족세력을 누르고 집권적 지배체제를 완성하는 것은 거의 11세기 말이 돼서였다. 그 같은 추세는 귀족·관료에게 토지를 나누는 제도에 잘 드러났다. 940년에 역분(役分)이란 명분의 사전을 지급했다. 976년에는 전시(田柴)라 하여 토지만이 아니라 연료를 채취하는 산지도 지급했다. 역분과 전시의 지급에는 체계적인 기준이 있지 않았다. 호족 출신은 지위가 낮아도 높은 지위의 관료보다 더 많은 전시를 받았다.

고려의 집권체제는 성종(981∼997)과 현종(1009∼1031) 연간에 크게 정비됐다. 거란과 벌인 세 차례의 전쟁이 그 배경이었다. 성종은 중앙군을 강화하고 주현(州縣)에 수령을 파견했다. 그러고선 호족이 보유한 군사력을 주현군(州縣軍)이란 이름의 지방군으로 편성해 수령의 통제 하에 뒀다. 이전까지 중앙정부의 재정은 조세와 공물의 운반을 담당한 호족세력에 의해 좌우됐다. 고려는 전국에 13개 조창(漕倉)을 설치하고 조세와 공물의 조운(漕運)을 직접 장악했다.

그와 더불어 세 차례에 걸쳐 사전 지급의 제도가 개정됐다. 호족이라 해서 관직도 없이 많이 받는 관행이 사라졌다. 사전은 제1과에서 제18과까지 관계(官階)에 따라 차등 지급됐다. 지방세력에 대한 지급은 대폭 축소됐다. 그 대신 중앙군에 대해서는 하급의 마군과 보군에 이르기까지 토지를 지급했다. 1076년의 마지막 개정은 곧바로 녹봉제(祿俸制)의 시행으로 이어졌다. 약 3000명의 문무관에게 토지를 대신해 녹봉을, 다시 말해 현물로 월급을 지급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중앙의 귀족·관료가 출신지의 사령을 직접 관리하는 관계와 그를 통해 맺어진 지방세력과의 연대가 끊어졌다.

전호

그 연장선에서 1108년 고려왕조는 공·사전을 망라한 전국의 농민을 전호(佃戶)라는 지위로 규정했다. 전(佃)은 토지를 빌려서 경작한다는 뜻이다. 전호라 함은 오늘날의 표현으로 소작농을 말한다. 11세기 말 전국의 토지를 국전으로 지배하는 고려의 집권체제는 거의 완성된 상태였다. 12세기 초의 전호 규정은 그런 시대적 상황을 전제한 것이었다. 고려의 농민은 호족의 지배에서 벗어나 국왕의 자애로운 보살핌을 받는, 국왕의 땅을 빌려 경작하는 공민(公民)으로 바뀌었다. 그와 더불어 공전과 사전의 조세율이 4분의 1로 같아지기 시작했다.

전호란 말의 기원은 중국의 송(宋)이다. 송은 민간의 토지 임대차 관계와 소작농을 가리켜 각각 주전제(主佃制)와 전호라고 불렀다. 11세기 말 송은 주전제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 전주(田主)와 전호의 지위에 차등을 두는 법을 제정했다. 고려왕조는 그 법을 백성의 지위를 규정하는 데 적용했다. 종래 고려의 전호를 송의 전호와 동질의 존재로 간주함으로써 고려사 연구에, 나아가 토지제도사 연구에 큰 혼란이 빚어졌다. 한국사와 중국사의 발전 단계와 수준을 동일시한 역사가들의 선입견이 그 주요 원인이었다.

국인의 나라

이전에 소개한 대로 12세기 고려의 인구는 총 250만∼300만 명에 달했다. 그중에 왕도 개경과 인근 주현에 밀집한 인구는 대략 50만 명이었다. 그 중핵은 4000여 명의 문관과 무관, 대략 3만 명에 달한 중앙군, 그리고 그들의 가속이었다. 《고려사》는 이들을 가리켜 국인(國人)이라 불렀다. 국인은 개경에 살면서 왕실을 옹위하는 귀족, 관료, 중앙군의 집단을 말했다. 국인은 조정의 정치를 주도했고, 여론의 향배를 결정했으며, 나아가 왕위 계승에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고려의 개경은 신라의 금성과 마찬가지로 지배세력의 군사공동체였다.

고려왕조는 개경에 집주한 국인의 군사공동체가 전국의 580여 주현과 같은 수의 향(鄕)·부곡(部曲)을 예속공동체로 지배하고 그로부터 조세와 공물을 수취한 공납제 국가였다. 고려는 국인과 향인을 차별했다. 지방의 향인은 거주와 직업을 속박당했다. 관청의 허락 없이 함부로 다른 지방으로 이사하거나 직업을 바꿀 수 없었다. 향인이 국인으로 승격하는 것은 소수에게만 허락된 특전이었다. 반면 국인이 향인으로 내쳐지는 것은 국인에겐 가장 가혹한 형벌인데, 귀향형(歸鄕刑)이라 했다. 고려는 송의 법을 빌려 썼는데, 귀향형은 송에 없는 고려 특유의 법이었다.

고려가 거란, 여진, 몽골, 홍건적으로부터 많은 외침을 당하고서도 자력으로 물리치거나 강인하게 저항한 것은 그 국가체제가 3만 명의 중앙군으로 이뤄진 군사공동체였기 때문이다. 이후 조선왕조는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이 같은 고려왕조의 국가체제를 많이도 왜곡했다. 고려는 조선과 같은 선비의 나라가 아니었다. 전쟁이 나면 솔선해서 전장으로 뛰어가는 군인의 나라였다. 나는 그 나라가 아름다웠기에 후대의 한국사가 국체를 보전했다고 믿는다. 《고려사》가 무신정권(武臣政權)의 장군들을 반역의 무리로 규정한 것은 유교적 충역의 기준에서였다. 한국의 문화가 아직도 그런 사관을 답습하고 있음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주현과 촌리

고려의 지방행정 단위로서 주현(州縣)은 대략 580곳이었다. 그 가운데 고려 말기까지 수령이 파견된 곳은 200곳을 넘지 않았다. 나머지는 속현(屬縣)이라 하여 수령이 파견된 주현(主縣)의 통제를 받았다. 이외에 향과 부곡이란 행정 단위가 있었다. 그 수는 대략 600이며, 역시 주현의 통제를 받았다. 그 아래에 촌(村), 리(里), 동(洞), 평(坪), 소(所), 포(浦) 등 다양한 명칭의 행정 단위가 있었는데, 총수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다. 고작 알려진 두 현의 사례에서 촌리의 수는 각각 3과 7이었다. 촌리에 속한 정호(丁戶)의 수가 얼마인지도 알 수 없는데, 단 하나의 사례가 전한다. 1360년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경기도 음죽현에 이르렀을 때 어느 촌의 10여 호가 남아서 왕의 군대를 영접했다. 촌의 호수가 10이라면 촌의 공연(孔烟)이 10∼15개인 7세기 말 신라촌장적의 시대와 별로 다르지 않다.

고려의 주현은 노동과 신앙 등 생활의 여러 방면에서 잘 단합된 공동체였다. 주현의 수령은 부처의 탄생일을 맞아 백성이 결집하는 팔관회를 열었다. 고려인은 미륵의 강생을 기원하면서 향나무를 땅에 묻고 그 위에다 비석을 세웠다. 남아 전하는 비석에 의하면 그 건립의 주체는 주현이었다. 주현의 행정은 지방세력이 모인 읍사(邑司)에서 이뤄졌다. 읍사는 주현의 공동체적 결속의 중심이었다. 1178년 청주인이 청주에 사는 국인을 모조리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자 국인들이 결사대를 모아 청주를 쳤는데, 이기지 못했다. 경주는 평소 영주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1201년 경주의 별초군이 영주를 공격했으나 영주의 정예군을 이기지 못했다. 중앙정부가 이 소식을 듣고 경주를 칠 궁리를 했다. 신라와 고려의 주현은 원래 읍락이거나 소국이었다. 위의 두 사건은 그에 뿌리를 둔 주현의 정체성이 12세기까지도 이어졌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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